아주 특별한 보물
손 연 자
두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동창모임에서 내 친구는 고대 중국의 명의 화타, 다섯 짐승, 기공의 원류, 비전의 전문 치료기공 운운하면서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오금희 예찬을 늘어놓았다. 얼굴이 이뻐진 이유를 대라는 우리들의 성화에 그동안 오금희를 수련해 왔다는 사실을 고백하고서였다.
“그런데 한 가지 단점이 있어.”
입에 침이 말랐던 방금 전의 예찬은 단번에 뒤집어졌다.
“너무너무 좋다는 거야.”
친구는 함빡 웃었다. 좋은 게 단점이라니! 언어의 수사학적 유희에 매료된 나는 그 길로 충정로 경기대학교 후문 근처에 있다는 수련장을 묻고 물어 찾아가 회원등록을 마쳤다. 일년 전, 유별나게 무덥던 7월의 첫 토요일 오후였다.
수련생들의 자기 소개가 끝나자 곧이어 오금희의 기원 설명과 선배 수련생의 시범이 있었다. 팔을 올리고 내리고 몸을 구부렸다 펴는가 하면 달리듯 구르고, 앉았다 서며 돌아서 내려치는 동작들이 아주 느리게 이어졌다. 판소리로 치자면 가장 느린 진양조 가락인 셈이었다. 정중동 속에 펼쳐진 팔십여 동작은 30분이 지나서야 끝났다.
몸으로 하는 운동하면 우선 쩌렁쩌렁한 기합이라든가 뻗고 내리쳐 상대를 제압하는 힘을 연상했었다. 그러나 오금희는 침묵과 느림으로 일관되었다. 과장이나 경직과는 거리가 먼 어찌 보면 기품마저 엿보이는 외유내강적 몸짓들이었다.
도중에 허리를 깊이 숙여 허리와 복부 가슴과 뒤통수를 두들기고 다리 정강이 발목 발가락을 비롯하여 이목구비를 비벼대는 안마를 보면서 나는 비로소 친구가 예뻐진 이유를 납득하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도 엉거주춤 앉아 두 손을 다리 사이로 죽 뻗는 동작과 혀를 말아 입술 사이에다 물고 버티고 앉는 동작은 보기가 다소 민망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흰 원숭이가 과일을 바치고 신령한 여우가 달을 보고 절을 하는 형상의 백원헌과와 선호배월이었다.
우리는 그날로 오금희의 예비공을 익히게 되었다. 맨 처음은 녹참원조였다. 바야흐로 관(冠)이 향기롭고 모가지가 긴, 높은 족속이자 슬픈 짐승인 ‘사슴’으로의 변신이 시작되었다.
‘마음은 고요히 하고 몸은 편안히 가진다.’
‘마치 사슴이 숲에서 고요히 먼 곳을 바라보는 형상과 같다.’
우리의 사부이신 김 교수님의 동작은 오금희의 교과서 그 자체였다. 겸허한 마음으로 가르침을 받으신 분, 세밀한 마음으로 실증을 하며 성실하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분, 우수한 성적으로 배운 내용을 완성하신 79대 재전(再傳) 제자이신 분이라는 곽정헌 화타문 총주지의 찬사는 거저 한 말씀이 아니었다.
선생님을 따라하며 세 가지의 동작을 익힌 우리는 두세 사람씩 앞으로 나와 되풀이했다. 나는 보기보다는 변죽이 없는 편이다. 그러므로 남들이 보는 앞에서 채 익지 않은 동작을 하고 틀린 부분을 지적 받는 일들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나이를 먹자마자 달려드는 건망증은 왜 그리 극성을 부리는지 도무지 감당이 안 되었다. 동기생들 몇몇은 여러 운동을 섭렵한 고수들이라 어떤 동작이든지 척척 해냈다. 나는 운동이라곤 그 흔한 에어로빅 한 번 안 하다가 뒤늦게야 겨우 수영을 했는데 다이빙을 강요하는 강사와 찬바람이 불자마자 소름이 돋는 찬물이 싫어서 그만둔 게 다였다.
야속하게도 나는 번번이 지적의 대상이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이러저러하게 몸 상태가 좋아졌다는 동기생들의 자랑이 잦아졌다. 그러나 나는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사 개월쯤 지나서인가 드디어 내게도 오금희의 위력이 드러난 사건(?)이 생겼다. 급한 일이 있어 롯데 백화점 앞에서 버스를 내려 명동성당을 향해 뛰기 시작했을 때였다. 문득 뛰기는커녕 걷기도 무거웠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로얄호텔 앞의 언덕 빼기까지 거뜬히 달려간 나는 물론 그 다음 모임에서 의기양양 떠버렸다.
수련장에서나 집에 와서 반복할 때나 매번 지독한 좌절의 늪을 헤맸던 내가 묵묵히 연습에 연습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는 선생님의 큰 눈과 주전자 가득 끓여놓는 차와 한 접시의 백설기 덕분이었다.
돌이켜보건대 오금희의 맛을 알아 가는 동안은 참으로 즐거웠다. 사무사(思無邪)의 경지에 오르기가 쉽지 않건만 사람과 짐승이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만은 그런 착각에 빠져들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오금희를 인연으로 하여 모인 사람들은 가르치는 분들이나 배우는 분들이나 하나같이 온유하고 점잖다. 검증되지 않은 가치관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이것 역시 큰 기쁨이다. 땀을 흠뻑 흘린 후 시골집에 모여 앉아 오가피주를 기울이는 멋도 일박의 남양주 세미나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의 하나였다.
팔 개월 동안의 초급과정과 동작을 세세하게 교정해주는 삼 개월 간의 중급과정이 끝나던 날은 장마 초입의 후텁지근한 비가 내렸다. 선생님은 그동안 오금희라는 보물을 깎고 다듬었으니 이제부터는 빛이 나도록 윤기를 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절차탁마 중에서 일년 여의 절차는 무사히 끝났다. 나는 아주 특별한 보물을 얻었다. 그 보물의 탁마는 이제 내 몫이다. 이 나이에도 좋은 게 단점이라는 말에 이끌려 무턱대고 달려든 후 마침내 그 의미를 간파해낸 내가 대견하다. 누군가가 나처럼 우연찮게나마 오금희와 인연이 닿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 복이 많은 사람일 것이다.
손 연 자
두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동창모임에서 내 친구는 고대 중국의 명의 화타, 다섯 짐승, 기공의 원류, 비전의 전문 치료기공 운운하면서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오금희 예찬을 늘어놓았다. 얼굴이 이뻐진 이유를 대라는 우리들의 성화에 그동안 오금희를 수련해 왔다는 사실을 고백하고서였다.
“그런데 한 가지 단점이 있어.”
입에 침이 말랐던 방금 전의 예찬은 단번에 뒤집어졌다.
“너무너무 좋다는 거야.”
친구는 함빡 웃었다. 좋은 게 단점이라니! 언어의 수사학적 유희에 매료된 나는 그 길로 충정로 경기대학교 후문 근처에 있다는 수련장을 묻고 물어 찾아가 회원등록을 마쳤다. 일년 전, 유별나게 무덥던 7월의 첫 토요일 오후였다.
수련생들의 자기 소개가 끝나자 곧이어 오금희의 기원 설명과 선배 수련생의 시범이 있었다. 팔을 올리고 내리고 몸을 구부렸다 펴는가 하면 달리듯 구르고, 앉았다 서며 돌아서 내려치는 동작들이 아주 느리게 이어졌다. 판소리로 치자면 가장 느린 진양조 가락인 셈이었다. 정중동 속에 펼쳐진 팔십여 동작은 30분이 지나서야 끝났다.
몸으로 하는 운동하면 우선 쩌렁쩌렁한 기합이라든가 뻗고 내리쳐 상대를 제압하는 힘을 연상했었다. 그러나 오금희는 침묵과 느림으로 일관되었다. 과장이나 경직과는 거리가 먼 어찌 보면 기품마저 엿보이는 외유내강적 몸짓들이었다.
도중에 허리를 깊이 숙여 허리와 복부 가슴과 뒤통수를 두들기고 다리 정강이 발목 발가락을 비롯하여 이목구비를 비벼대는 안마를 보면서 나는 비로소 친구가 예뻐진 이유를 납득하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도 엉거주춤 앉아 두 손을 다리 사이로 죽 뻗는 동작과 혀를 말아 입술 사이에다 물고 버티고 앉는 동작은 보기가 다소 민망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흰 원숭이가 과일을 바치고 신령한 여우가 달을 보고 절을 하는 형상의 백원헌과와 선호배월이었다.
우리는 그날로 오금희의 예비공을 익히게 되었다. 맨 처음은 녹참원조였다. 바야흐로 관(冠)이 향기롭고 모가지가 긴, 높은 족속이자 슬픈 짐승인 ‘사슴’으로의 변신이 시작되었다.
‘마음은 고요히 하고 몸은 편안히 가진다.’
‘마치 사슴이 숲에서 고요히 먼 곳을 바라보는 형상과 같다.’
우리의 사부이신 김 교수님의 동작은 오금희의 교과서 그 자체였다. 겸허한 마음으로 가르침을 받으신 분, 세밀한 마음으로 실증을 하며 성실하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분, 우수한 성적으로 배운 내용을 완성하신 79대 재전(再傳) 제자이신 분이라는 곽정헌 화타문 총주지의 찬사는 거저 한 말씀이 아니었다.
선생님을 따라하며 세 가지의 동작을 익힌 우리는 두세 사람씩 앞으로 나와 되풀이했다. 나는 보기보다는 변죽이 없는 편이다. 그러므로 남들이 보는 앞에서 채 익지 않은 동작을 하고 틀린 부분을 지적 받는 일들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나이를 먹자마자 달려드는 건망증은 왜 그리 극성을 부리는지 도무지 감당이 안 되었다. 동기생들 몇몇은 여러 운동을 섭렵한 고수들이라 어떤 동작이든지 척척 해냈다. 나는 운동이라곤 그 흔한 에어로빅 한 번 안 하다가 뒤늦게야 겨우 수영을 했는데 다이빙을 강요하는 강사와 찬바람이 불자마자 소름이 돋는 찬물이 싫어서 그만둔 게 다였다.
야속하게도 나는 번번이 지적의 대상이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이러저러하게 몸 상태가 좋아졌다는 동기생들의 자랑이 잦아졌다. 그러나 나는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사 개월쯤 지나서인가 드디어 내게도 오금희의 위력이 드러난 사건(?)이 생겼다. 급한 일이 있어 롯데 백화점 앞에서 버스를 내려 명동성당을 향해 뛰기 시작했을 때였다. 문득 뛰기는커녕 걷기도 무거웠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로얄호텔 앞의 언덕 빼기까지 거뜬히 달려간 나는 물론 그 다음 모임에서 의기양양 떠버렸다.
수련장에서나 집에 와서 반복할 때나 매번 지독한 좌절의 늪을 헤맸던 내가 묵묵히 연습에 연습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는 선생님의 큰 눈과 주전자 가득 끓여놓는 차와 한 접시의 백설기 덕분이었다.
돌이켜보건대 오금희의 맛을 알아 가는 동안은 참으로 즐거웠다. 사무사(思無邪)의 경지에 오르기가 쉽지 않건만 사람과 짐승이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만은 그런 착각에 빠져들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오금희를 인연으로 하여 모인 사람들은 가르치는 분들이나 배우는 분들이나 하나같이 온유하고 점잖다. 검증되지 않은 가치관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이것 역시 큰 기쁨이다. 땀을 흠뻑 흘린 후 시골집에 모여 앉아 오가피주를 기울이는 멋도 일박의 남양주 세미나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의 하나였다.
팔 개월 동안의 초급과정과 동작을 세세하게 교정해주는 삼 개월 간의 중급과정이 끝나던 날은 장마 초입의 후텁지근한 비가 내렸다. 선생님은 그동안 오금희라는 보물을 깎고 다듬었으니 이제부터는 빛이 나도록 윤기를 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절차탁마 중에서 일년 여의 절차는 무사히 끝났다. 나는 아주 특별한 보물을 얻었다. 그 보물의 탁마는 이제 내 몫이다. 이 나이에도 좋은 게 단점이라는 말에 이끌려 무턱대고 달려든 후 마침내 그 의미를 간파해낸 내가 대견하다. 누군가가 나처럼 우연찮게나마 오금희와 인연이 닿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 복이 많은 사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