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일이 아련한 기억으로 떠오른다. 길모퉁이에 쌓여있던 모래더미에서 두꺼비 집을 지으며 해지는 줄도 모르고 놀았던 일. 누군가 집을 수리하려고 가져다 놓은 자그만 모래더미가 몇일 동안 나의 좋은 놀이터였다. 촉촉한 모래알의 감촉이 지금도 생생히 되살아난다. 생각해 보면, 그저 모래를 만지작거리면서 지었다가 허물고 지었다가 허물고, 밥 먹는 것도 잊고 집에 돌아가야 하는 것도 잊고 노는 것이 나의 천성인 모양이다. 커서 내가 한 일도 모두 이런 터라 남들이 보면 어린애같이 잘도 논다고 할 것이다. 단조로운 반복을 참는 것, 즐기는 것. 단조로운 반복 속에서 재미를 찾는 것. 어떤 사람들은 이런 태도를 꿈이 없고, 목표가 없고, 발전이 없는 태도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 지적이 일면 맞기도 하지만 또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반복이 어느 순간에 자연히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2003년 1월부터 화타오금희를 배우게 되었다. 그 전해 연말에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대학 동기이자 어진 형님이고 지금은 오금희 사부님인 김성기 교수에게 오금희를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1월에 시작하는 반이 있으니 와서 열심히 배우라고 하여 시작한 것이다. 나는 김교수가 ‘오금희’라는 것을 가르친다는 이야기를 그보다 훨씬 전에 듣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내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오금희’ 가운데 ‘금’자에 있었다. 짐승의 동작이 매우 재미있을 것이라는 상상이었고, 오금희가 기공 수련 계통이라는 것은 전혀 몰랐다. 지금 전체 동작을 제대로 하지는 못하지만 다 배운 상태에서 보면 나의 이 생각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내가 상상한 동물들의 동작보다는 훨씬 점잖고 격렬하지 않았다. 오금희 배우러 간 첫날 오늘은 대략 인사나 하고 오금희 소개나 하겠지 하고 있는데 윤산 사범의 시범과 바로 예비공 다섯 동작을 배우면서 양복 바지가 틋어질까 하여 ‘웅부신요’ 자세가 엉거주춤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무튼 오금희 첫날의 일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공교롭게도 오금희가 기공이었다면 나는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의사들과 함께하는 공부 모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철학분과에서 동학들과 함께 보는 자료들에서 기와 연관된 글을 자주 만나면서도 기에 대한 신비적 해석을 비판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공이나 수련, 초능력을 체험하고 수련한 사람들도 주위에 많았지만 나에게 그것을 강력히 추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사람들은 학술적인 자료를 받고 싶어하는 편이었다.
직접 오금희를 배워가면서 나는 오금희의 ‘오’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가 배운 오금희에는 다섯 동물 이름만 등장하지 않는다. ‘백망(구렁이)’ ‘서우(물소)’ ‘선호(여우)’등은 사슴, 곰, 원숭이, 새, 호랑이 이 다섯 대표적 동물과 다른 이름이다. 새도 ‘금계(닭)’나 ‘백학’으로 한 이름이 아니다. 그래서 ‘오’라는 글자는 한의학의 오행사상과 밀접한 글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행사상에 따르면 몸속에 들어있는 오장은 겉으로 드러난 몸의 각부분과 연관되어 있고 정서, 심리 작용과도 연관을 가진다. 오금희의 동작들이 팔과 다리와 몸통과 척추와 눈과 혀와 목과 기타 등등, 신체에 안 건드리는 부분 없이 움직여 주니 이와 연관되어 있는 장부에 영향을 주고 나아가 심리 상태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설정은 한의학의 오행사상에서 보면 매우 평범한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수공’의 ‘선유녹경’을 불완전하게나마 해낼 수 있게 된 상태에서 나는 오금희의 ‘희’자에 가장 관심을 가진다. 이것은 나의 천성과도 잘 맞는다. 현대인들은 좀더 적게 일하고 좀더 많이 놀아야 한다는 게 10여 년 전부터 내가 펼친 지론이다.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해야 하는 기계가 되어가는 것이 불행한 우리의 삶의 모습이다. 아껴 쓰고 고루 나눠 먹으면 밥 먹고 할일 없는 시간이 너무 많을 현대인들이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먹고, 자손만대까지 먹을 것을 오늘 다 마련하려는 욕심과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이런 욕심을 채우려다 보니 늘 바쁘다. 그런데 이런 경쟁에서 한 걸음 벗어나면 밥 먹고 할일 없는 시간이 참 많다. 그 때 무얼 할 것인가? 나는 놀이를 권한다. 오금희는 나에게 참 좋은 놀이가 되었다. 깊은 뜻을 가지고 열심히 가르쳤는데 오금희를 바둑알이나 당구공 정도로 취급하는 것 같아 사부, 사범님들의 성의에 미안하지만 나에게 오금희는 좋은 놀이다. 맹자에게 안타까운 한 가지는 여러 성인을 이야기 하면서 ‘놀이의 성인’ ‘유희하는 성자’를 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자가 출세를 꿈꾸는 여러 제자들 앞에서 ‘기수에서 목욕하고 언덕에 올라 봄바람을 쐬고 싶다’는 증석의 꿈에 동참했던 것을 보면 이런 기미를 좀 보였지만 다른 칭호가 워낙 위압적이어서 ‘놀이의 성인’으로 모시기는 좀 어렵겠다. 지금처럼 남아돌고 배가 터지는 시대가 아니라 땀 흘려 일해도 보릿고개 넘기기 힘든 때에 ‘될 수 있으면 놀아라’ 하는 기치를 내걸 수는 없을 것이니 옛날에 유희의 성자를 찾기는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오금희를 만든 화타님은? 화담 선생의 문집에 화담은 좋은 경치를 만나면 문득 그 자리에서 춤을 추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춤은 어떤 춤이었을까?
오금희 여러 동작 가운데 얽힌 기억들을 더듬어 본다. 예비공을 집에서 할 때 옆에서 보고 있던 아내가 ‘그 운동이 참 좋겠어요’ 했다. 몇 주 뒤에 ‘우선녹분’를 보더니 ‘그 자세는 좀 괴상하네요. 나는 배우고 싶지 않아지네요’ 해서 지금도 우선녹분을 할 때면 그 말이 생각난다. 팔꿈치, 손끝, 눈의 시선, 그러다 의식을 미려에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면 횟수가 24번을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특별히 흥미로왔던 동작은 대개 새 동작이었다. 백학포단, 백학요보, 백학비상 등은 특별히 더 재미있다. 배울 때도 지적을 많이 받았지만 아직도 마음에 제일 안 드는 자세는 녹앙회고, 오른 다리도 다 펴지지 않고 왼손은 수직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오금희 시작할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 말고는 오금희에 결석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했는데 결국 지각도 몇 번하고 한 번 빠지기도 하였다. 한 번 빠진 날은 같이 배우러 다닌 김태완 선생을 밤에 불러내 망원동 주택가 놀이터에서 원리삼초, 웅연장부, 맹호하산을 전해 배웠는데 그 다음 주에 좀 일찍 가서 박윤선 사부께 개인지도를 받았다. 이 동작을 할 때면 이런 일들이 다시 떠오른다. 정말 황당한 기억은 수공의 ‘선유녹경’을 배우고 나서였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겠는데 목과 혀가 말을 안 듣는다. 겨우 길을 만들어서 돌려보지만 6,7회 하면 목이 찌릿찌릿하여 더 할 수가 없었다. 다 배웠다고 하더니 이런 폭탄을 장치해 두었구나 하면서 이 동작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그 다음날 횟수를 다 채워서 해내기는 했다. 오금희 배우면서 약간의 문제가 생긴 것이 두 번인데 한 번은 백학장흉을 하면서 목을 한껏 제치고 힘차게 구르다가 목이 ‘뚝’하고 말았다. 그러고 나니 무엇을 삼키기 불편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져 침을 삼키기도 괴로웠다. 목뼈가 일난 모양이다 하고 좀더 기다려 보았더니 이틀 쯤 지나서 사라졌다. 물론 목 안이 불편할 때도 오금희는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 목욕탕에서 귀에 물이 들어가 완전히 빠지지 않은 느낌이었는데 안마를 하면서 천고를 세게 울리고 나니 귀가 약간씩 아파왔다. 목의 통증과 결합하여 얼굴의 하반이 열기가 있어 이러다가 중이염이라도 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하루 정도 지나니 좋아졌다. 여름에 안마에 들어가면 얼굴에 땀이 나서 땀으로 얼굴을 세수하게 되는데 이 때 짠물이 눈에 들어가면 따갑다. 눈에 좋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여 세수를 좀더 조심스럽게 하기도 했다. 태양혈 안마 때 엄지손가락의 위치는 대영혈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우리 반에 한의사들이 있으니 이 혈자리의 기능과 타당성에 대하여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지가 오랜데 아직 말하지 못하고 여기에 기록하게 되었다.
오금희를 배우면서 나의 몸과 생활의 변화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그러나 미묘한 변화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느낀다. 오금희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울을 보면서 생각한 일이 기억난다. 원래 명랑 쾌활하고 잘 웃기 때문에 남들이 가볍고 위엄이 없는 사람으로 보는 것에 마음을 쓰고 있었는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서 호랑이의 인상이 조금 추가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착각이겠지만 기분이 좋았다. 좀더 지나서는 가슴이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역기를 든 것도 아니지만 팔을 들었다 내렸다하고 몸을 비틀고 하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3,4개월 쯤 뒤에 허리띠를 한 코 줄여야 했다. 나와 같이 시작한 김태완 선생도 비슷한 시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살이 빠졌다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체중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그 뒤에는 5,6년 전에 어깨 뼈 아래에 생긴 통점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한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목을 움직일 때 약간씩 불편을 감지하던 것이 다시 뚜렷이 나타난 것이다. 한의사 친구들과 상의했더니 부항으로 사혈을 한 번 해보는 것도 좋겠다고 하였다. 좀더 두고 보기로 하고 지났더니 지금은 다시 사라졌다. 5년쯤 전부터 밤을 자주 새기도 하였는데(1년중 3분의 2는 밤에 자지 않았다) 그러면 치통이 자주 왔었다. 그러나 오금희 한 이후 저녁에 하품이 나고 밤새는 일이 적어져 이런 문제도 해결되었다. 거의 마지막 동작을 배우는 단계, 7개월 정도 지나서 혼자 수련하다가 흠칫 놀란 적이 있었다. 백학포단을 하는데 아랫배가 매우 단단해진 것을 알았다. 어제까지는 몰랐었다. 한번 의식하게 되니 계속 지각되었고, 동작하면서 살펴보니 백학포단의 자세는 하복의 근육들을 계속 움직이는 동작이었다. 우선녹분이나 호박녹분, 웅우항고, 웅좌항고 등 다리를 구부리고 굴리는 동작은 하복의 근육을 단단하게 만들 것이므로 필연의 결과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니 아랫배가 뜨겁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련기를 써야 한다기에 선배들의 수련기를 읽어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떤 선배의 글에 오금희를 하면 아미타불의 마음이 된다는 이야기를 읽고 깜짝 놀랐다. 이 선배는 아마 오금희 하기 전에 이미 아미타불의 마음이거나 그에 가까운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나는 오금희를 배우면서 특이한 변화나 특별한 일은 없었다고 해야겠다. 술도 더 마시고 담배도 더 늘었다. 오히려 이런 것은 내 의지로 조정해야 하는 일들이겠다. 또 하나 밝히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나의 오금희 수련은 반이 술을 마시고 한 것이었다. 새벽까지 술마시고 2시가 넘어서 집에 도착하면 아파트 단지의 공원에서 오금희를 하고 들어가는 그런 식이다. 수련기는 실험보고서처럼 솔직하게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기록하여 둔다.
우주 안에서 나는 지극히 작고 작은 한 몸이고 오금희는 이 작은 몸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 중의 일부분이다. 이 우주 안에서 나의 오금희는 아주 작고 작다. 이것은 최근에 혼자 오금희를 수련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온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오금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만나는 사람들에게 항상 오금희를 권장했다. 스스로 충분히 잘 알지도 못하면서 권한 것은 다른 놀이의 경험을 바탕으로 오금희가 참 재미있고 유익한 놀이라는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금희가 작고 작은 자기 한 몸의 건강을 위한 목적으로 끝난다면 그것도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으로는 너무 사소하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자기만을 위해서 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살만한 세상을 보지 못할 것 같다.
끝으로 좋은 오금희를 열성으로 전해준 사부님과 사범님들 그리고 용기와 격려를 준 동기생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겠다. 윤산 사범은 우리 7기에게 엄청난 덕담을 하고 힘을 실어주어 많은 동기생들이 큰 힘을 얻었다고 느낀다. 윤산 사범의 첫날 시범 동작이나 지도 과정에서 보여주는 동작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좀 일찍 도착하여 다른 반 수련을 본 적이 있었는데 앞에서 지도하는 윤산의 웅부신요 일어나는 동작에서 사람의 척추가 백두대간이 일어나는 느낌을 연출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최선생님께서는 무리 없는 동작으로 젊은 친구들의 유연성을 흉내낼 수 없는 뻣뻣하게 굳은 우리 40대 남자들이 수련을 계속할 수 있도록 늘 격려와 힘을 넣어 주셨다. 우리가 수련 100일 즈음에 회식 자리에서 ‘오금희는 무지 무지 야한 운동이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모르는 사람 앞에서 엉덩이를 치켜들고, 코를 풀고, 혓바닥을 내보이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오금희 때문에 서로 다 보여 주었다. 그래서 말없이 친숙해 진지도 모른다. 어느 날 아이들과 둘러앉아서 윗몸 앞으로 굽히기를 하였는데 내 머리가 다리에 닿았고 중학교 다니는 아들은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비공만 가르치려고 따라하게 하였는데 강압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는데도 매우 부담스러워 하였다. 아마 김교수가 나 혼자만 불러서 가르쳤다면 끝까지 배우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같이 운동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김태완 선생이나 다른 동기생들이 알게 모르게 힘이 되어 전 과정을 마칠 수 있게 한 것이라고 믿는다.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이제 오금희 하러 갈 시간이라 여기서 그쳐야겠다.(2003.9.20)
2003년 1월부터 화타오금희를 배우게 되었다. 그 전해 연말에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대학 동기이자 어진 형님이고 지금은 오금희 사부님인 김성기 교수에게 오금희를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1월에 시작하는 반이 있으니 와서 열심히 배우라고 하여 시작한 것이다. 나는 김교수가 ‘오금희’라는 것을 가르친다는 이야기를 그보다 훨씬 전에 듣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내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오금희’ 가운데 ‘금’자에 있었다. 짐승의 동작이 매우 재미있을 것이라는 상상이었고, 오금희가 기공 수련 계통이라는 것은 전혀 몰랐다. 지금 전체 동작을 제대로 하지는 못하지만 다 배운 상태에서 보면 나의 이 생각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내가 상상한 동물들의 동작보다는 훨씬 점잖고 격렬하지 않았다. 오금희 배우러 간 첫날 오늘은 대략 인사나 하고 오금희 소개나 하겠지 하고 있는데 윤산 사범의 시범과 바로 예비공 다섯 동작을 배우면서 양복 바지가 틋어질까 하여 ‘웅부신요’ 자세가 엉거주춤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무튼 오금희 첫날의 일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공교롭게도 오금희가 기공이었다면 나는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의사들과 함께하는 공부 모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철학분과에서 동학들과 함께 보는 자료들에서 기와 연관된 글을 자주 만나면서도 기에 대한 신비적 해석을 비판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공이나 수련, 초능력을 체험하고 수련한 사람들도 주위에 많았지만 나에게 그것을 강력히 추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사람들은 학술적인 자료를 받고 싶어하는 편이었다.
직접 오금희를 배워가면서 나는 오금희의 ‘오’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가 배운 오금희에는 다섯 동물 이름만 등장하지 않는다. ‘백망(구렁이)’ ‘서우(물소)’ ‘선호(여우)’등은 사슴, 곰, 원숭이, 새, 호랑이 이 다섯 대표적 동물과 다른 이름이다. 새도 ‘금계(닭)’나 ‘백학’으로 한 이름이 아니다. 그래서 ‘오’라는 글자는 한의학의 오행사상과 밀접한 글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행사상에 따르면 몸속에 들어있는 오장은 겉으로 드러난 몸의 각부분과 연관되어 있고 정서, 심리 작용과도 연관을 가진다. 오금희의 동작들이 팔과 다리와 몸통과 척추와 눈과 혀와 목과 기타 등등, 신체에 안 건드리는 부분 없이 움직여 주니 이와 연관되어 있는 장부에 영향을 주고 나아가 심리 상태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설정은 한의학의 오행사상에서 보면 매우 평범한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수공’의 ‘선유녹경’을 불완전하게나마 해낼 수 있게 된 상태에서 나는 오금희의 ‘희’자에 가장 관심을 가진다. 이것은 나의 천성과도 잘 맞는다. 현대인들은 좀더 적게 일하고 좀더 많이 놀아야 한다는 게 10여 년 전부터 내가 펼친 지론이다.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해야 하는 기계가 되어가는 것이 불행한 우리의 삶의 모습이다. 아껴 쓰고 고루 나눠 먹으면 밥 먹고 할일 없는 시간이 너무 많을 현대인들이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먹고, 자손만대까지 먹을 것을 오늘 다 마련하려는 욕심과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이런 욕심을 채우려다 보니 늘 바쁘다. 그런데 이런 경쟁에서 한 걸음 벗어나면 밥 먹고 할일 없는 시간이 참 많다. 그 때 무얼 할 것인가? 나는 놀이를 권한다. 오금희는 나에게 참 좋은 놀이가 되었다. 깊은 뜻을 가지고 열심히 가르쳤는데 오금희를 바둑알이나 당구공 정도로 취급하는 것 같아 사부, 사범님들의 성의에 미안하지만 나에게 오금희는 좋은 놀이다. 맹자에게 안타까운 한 가지는 여러 성인을 이야기 하면서 ‘놀이의 성인’ ‘유희하는 성자’를 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자가 출세를 꿈꾸는 여러 제자들 앞에서 ‘기수에서 목욕하고 언덕에 올라 봄바람을 쐬고 싶다’는 증석의 꿈에 동참했던 것을 보면 이런 기미를 좀 보였지만 다른 칭호가 워낙 위압적이어서 ‘놀이의 성인’으로 모시기는 좀 어렵겠다. 지금처럼 남아돌고 배가 터지는 시대가 아니라 땀 흘려 일해도 보릿고개 넘기기 힘든 때에 ‘될 수 있으면 놀아라’ 하는 기치를 내걸 수는 없을 것이니 옛날에 유희의 성자를 찾기는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오금희를 만든 화타님은? 화담 선생의 문집에 화담은 좋은 경치를 만나면 문득 그 자리에서 춤을 추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춤은 어떤 춤이었을까?
오금희 여러 동작 가운데 얽힌 기억들을 더듬어 본다. 예비공을 집에서 할 때 옆에서 보고 있던 아내가 ‘그 운동이 참 좋겠어요’ 했다. 몇 주 뒤에 ‘우선녹분’를 보더니 ‘그 자세는 좀 괴상하네요. 나는 배우고 싶지 않아지네요’ 해서 지금도 우선녹분을 할 때면 그 말이 생각난다. 팔꿈치, 손끝, 눈의 시선, 그러다 의식을 미려에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면 횟수가 24번을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특별히 흥미로왔던 동작은 대개 새 동작이었다. 백학포단, 백학요보, 백학비상 등은 특별히 더 재미있다. 배울 때도 지적을 많이 받았지만 아직도 마음에 제일 안 드는 자세는 녹앙회고, 오른 다리도 다 펴지지 않고 왼손은 수직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오금희 시작할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 말고는 오금희에 결석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했는데 결국 지각도 몇 번하고 한 번 빠지기도 하였다. 한 번 빠진 날은 같이 배우러 다닌 김태완 선생을 밤에 불러내 망원동 주택가 놀이터에서 원리삼초, 웅연장부, 맹호하산을 전해 배웠는데 그 다음 주에 좀 일찍 가서 박윤선 사부께 개인지도를 받았다. 이 동작을 할 때면 이런 일들이 다시 떠오른다. 정말 황당한 기억은 수공의 ‘선유녹경’을 배우고 나서였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겠는데 목과 혀가 말을 안 듣는다. 겨우 길을 만들어서 돌려보지만 6,7회 하면 목이 찌릿찌릿하여 더 할 수가 없었다. 다 배웠다고 하더니 이런 폭탄을 장치해 두었구나 하면서 이 동작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그 다음날 횟수를 다 채워서 해내기는 했다. 오금희 배우면서 약간의 문제가 생긴 것이 두 번인데 한 번은 백학장흉을 하면서 목을 한껏 제치고 힘차게 구르다가 목이 ‘뚝’하고 말았다. 그러고 나니 무엇을 삼키기 불편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져 침을 삼키기도 괴로웠다. 목뼈가 일난 모양이다 하고 좀더 기다려 보았더니 이틀 쯤 지나서 사라졌다. 물론 목 안이 불편할 때도 오금희는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 목욕탕에서 귀에 물이 들어가 완전히 빠지지 않은 느낌이었는데 안마를 하면서 천고를 세게 울리고 나니 귀가 약간씩 아파왔다. 목의 통증과 결합하여 얼굴의 하반이 열기가 있어 이러다가 중이염이라도 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하루 정도 지나니 좋아졌다. 여름에 안마에 들어가면 얼굴에 땀이 나서 땀으로 얼굴을 세수하게 되는데 이 때 짠물이 눈에 들어가면 따갑다. 눈에 좋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여 세수를 좀더 조심스럽게 하기도 했다. 태양혈 안마 때 엄지손가락의 위치는 대영혈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우리 반에 한의사들이 있으니 이 혈자리의 기능과 타당성에 대하여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지가 오랜데 아직 말하지 못하고 여기에 기록하게 되었다.
오금희를 배우면서 나의 몸과 생활의 변화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그러나 미묘한 변화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느낀다. 오금희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울을 보면서 생각한 일이 기억난다. 원래 명랑 쾌활하고 잘 웃기 때문에 남들이 가볍고 위엄이 없는 사람으로 보는 것에 마음을 쓰고 있었는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서 호랑이의 인상이 조금 추가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착각이겠지만 기분이 좋았다. 좀더 지나서는 가슴이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역기를 든 것도 아니지만 팔을 들었다 내렸다하고 몸을 비틀고 하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3,4개월 쯤 뒤에 허리띠를 한 코 줄여야 했다. 나와 같이 시작한 김태완 선생도 비슷한 시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살이 빠졌다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체중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그 뒤에는 5,6년 전에 어깨 뼈 아래에 생긴 통점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한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목을 움직일 때 약간씩 불편을 감지하던 것이 다시 뚜렷이 나타난 것이다. 한의사 친구들과 상의했더니 부항으로 사혈을 한 번 해보는 것도 좋겠다고 하였다. 좀더 두고 보기로 하고 지났더니 지금은 다시 사라졌다. 5년쯤 전부터 밤을 자주 새기도 하였는데(1년중 3분의 2는 밤에 자지 않았다) 그러면 치통이 자주 왔었다. 그러나 오금희 한 이후 저녁에 하품이 나고 밤새는 일이 적어져 이런 문제도 해결되었다. 거의 마지막 동작을 배우는 단계, 7개월 정도 지나서 혼자 수련하다가 흠칫 놀란 적이 있었다. 백학포단을 하는데 아랫배가 매우 단단해진 것을 알았다. 어제까지는 몰랐었다. 한번 의식하게 되니 계속 지각되었고, 동작하면서 살펴보니 백학포단의 자세는 하복의 근육들을 계속 움직이는 동작이었다. 우선녹분이나 호박녹분, 웅우항고, 웅좌항고 등 다리를 구부리고 굴리는 동작은 하복의 근육을 단단하게 만들 것이므로 필연의 결과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니 아랫배가 뜨겁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련기를 써야 한다기에 선배들의 수련기를 읽어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떤 선배의 글에 오금희를 하면 아미타불의 마음이 된다는 이야기를 읽고 깜짝 놀랐다. 이 선배는 아마 오금희 하기 전에 이미 아미타불의 마음이거나 그에 가까운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나는 오금희를 배우면서 특이한 변화나 특별한 일은 없었다고 해야겠다. 술도 더 마시고 담배도 더 늘었다. 오히려 이런 것은 내 의지로 조정해야 하는 일들이겠다. 또 하나 밝히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나의 오금희 수련은 반이 술을 마시고 한 것이었다. 새벽까지 술마시고 2시가 넘어서 집에 도착하면 아파트 단지의 공원에서 오금희를 하고 들어가는 그런 식이다. 수련기는 실험보고서처럼 솔직하게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기록하여 둔다.
우주 안에서 나는 지극히 작고 작은 한 몸이고 오금희는 이 작은 몸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 중의 일부분이다. 이 우주 안에서 나의 오금희는 아주 작고 작다. 이것은 최근에 혼자 오금희를 수련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온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오금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만나는 사람들에게 항상 오금희를 권장했다. 스스로 충분히 잘 알지도 못하면서 권한 것은 다른 놀이의 경험을 바탕으로 오금희가 참 재미있고 유익한 놀이라는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금희가 작고 작은 자기 한 몸의 건강을 위한 목적으로 끝난다면 그것도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으로는 너무 사소하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자기만을 위해서 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살만한 세상을 보지 못할 것 같다.
끝으로 좋은 오금희를 열성으로 전해준 사부님과 사범님들 그리고 용기와 격려를 준 동기생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겠다. 윤산 사범은 우리 7기에게 엄청난 덕담을 하고 힘을 실어주어 많은 동기생들이 큰 힘을 얻었다고 느낀다. 윤산 사범의 첫날 시범 동작이나 지도 과정에서 보여주는 동작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좀 일찍 도착하여 다른 반 수련을 본 적이 있었는데 앞에서 지도하는 윤산의 웅부신요 일어나는 동작에서 사람의 척추가 백두대간이 일어나는 느낌을 연출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최선생님께서는 무리 없는 동작으로 젊은 친구들의 유연성을 흉내낼 수 없는 뻣뻣하게 굳은 우리 40대 남자들이 수련을 계속할 수 있도록 늘 격려와 힘을 넣어 주셨다. 우리가 수련 100일 즈음에 회식 자리에서 ‘오금희는 무지 무지 야한 운동이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모르는 사람 앞에서 엉덩이를 치켜들고, 코를 풀고, 혓바닥을 내보이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오금희 때문에 서로 다 보여 주었다. 그래서 말없이 친숙해 진지도 모른다. 어느 날 아이들과 둘러앉아서 윗몸 앞으로 굽히기를 하였는데 내 머리가 다리에 닿았고 중학교 다니는 아들은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비공만 가르치려고 따라하게 하였는데 강압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는데도 매우 부담스러워 하였다. 아마 김교수가 나 혼자만 불러서 가르쳤다면 끝까지 배우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같이 운동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김태완 선생이나 다른 동기생들이 알게 모르게 힘이 되어 전 과정을 마칠 수 있게 한 것이라고 믿는다.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이제 오금희 하러 갈 시간이라 여기서 그쳐야겠다.(2003.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