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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타오금희

정회원 수련기

김 숙 경
체주의 오금희 평론 : 생성과 변화의 철학 - 오금희에 바친다

- 그것은 탄생에 꼭 맞는 죽음, 발아인 동시에 멸진 -

김 숙 경

오금희를 시작한지 어언 1년이 되어 중급 심사를 남겨두고 수련기를 써야 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열심히 수련 정진하지 않은 것이 못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오금희 수련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져야 하겠지만 그래도 정규 수련 과정을 마친 기념으로 무언가 하나쯤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 수련기라는 취지에 걸맞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나름대로 그간 제가 공부해온 분야를 토대로 하여 오금희의 기본 정신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감히 오금희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이 주제 넘는 짓이 아닐까 하는 망설임도 없지 않았습니다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무대포로 치기를 한 번 부려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여러 선생님들의 질책과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글은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라는 말로 대변 될 수 있는 오금희의 기본 원리를 ‘운동’ ‘생성’ ‘변화’의 성격으로 규정하고, 동서고금의 철학과 과학, 종교와 신화 속에서 공통의 원리들을 찾아봄과 동시에 그들이 한데 뒤엉켜 이 시대를 관통해 흐르는 ‘해체’와 ‘탈경계’라는 혼돈의 물줄기 속에서 조심스럽게 오금희의 자취를 찾아보고자 하였습니다. 그 결과 역시 세상은 ‘혼돈 자체로 조화’라는 사실을 재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고정불변의 그 무엇이 아닌 끊임없이 활동하고 생성하고 변화하는 ‘사건’의 연속체입니다. 사건은 현실의 표면 위로 시시각각 솟아오르고 솟아오르는가 하면 어느덧 사위어 갑니다. 그것은 ‘탄생인 동시에 죽음’이며 ‘발아인 동시에 멸진’입니다.
우리는 오금희의 율동에서 바로 그러한 세상의 모습을 봅니다.
오금희는 바로 세상 그 자체입니다.
바라건데, 오금희의 정신과 몸이 함께 어우러져 ‘나’라는 ‘기관체’를 통해 구현되기를.....

보잘 것 없는 이 글을 생활에서 늘 운동과 변화가 부족한 저에게 심신의 평안과 건강을 가져다준 오금희에게 바칩니다.
그리고 저를 지도해주신 사부님과 원장님, 도와주신 여러 사범님들, 결코 쉽지 않은 길을 함께 격려해가며 동행 해주신 동기 선생님들, 모든 오금희 가족 여러분들, 이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04년 3월 28일 김숙경 드림

만물은 생성 변화한다.(1) : 서양 철학 - 공간의 철학에서 시간의 철학으로.

데리다의 해체 철학은 플라톤으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형이상학이 줄기차게 추구해온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진리의 참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지향과 물음들을 낱낱이 해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철학이다.
여기서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진리의 참존재’란 시시각각 변해가는 세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절대로 변치 않는 그 무엇’ 즉 ‘본질(本質) 적인 것’을 말함이다.
플라톤의 ‘이데아(Idea)'에서 비롯된 바로 이 ’본질‘ 개념은 중세의 神, 근대에 이르러서는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사유하는 주체, 즉 인간의 이성) 등으로 서구 사유의 역사 속에서 도도한 물줄기를 형성해왔던 것이다.
이렇듯 영원히 변치 않는 ‘고정불변의 것’을 오랜 세월 끈질기게 떠받들어 온 서구의 전통 형이상학을 우리는 ‘공간적 사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간적 사유’가 ‘불변의 진리’를 추구한다고 할 때 ‘시간적 사유’는 ‘생성과 변화’를 사유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시간이란 다름아닌 쉬임 없는 변화로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서구의 전통 형이상학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시간적 사유’는 비본질적인 것, 시시각각 변해가고 사라져가는 덧없는 것, 그리하여 불완전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존재의 배후로 밀려나게 되었다.
다시말해 서구의 전통 형이상학은 철저하게 공간 위주의 사유였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헤겔은 ‘변증법’이라는 사유 방식을 통해 종래의 공간 위주의 사유체계 속에 시간의 개념을 도입하게 된다. 헤겔을 시발점으로 하는 시간적 사유의 전통은 니체, 베르그송, 화이트헤드와 같은 철학자들에게로 이어지는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공간 보다는 시간 위주의 사유를 하며 고정불변의 법칙이 아닌 변화와 생성을 중요시 한다.
이들보다 더욱 철저하게 절대불변의 법칙을 부정하며 극단의 상대주의로 치닫는 것이 바로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이다.
데리다는 그의 저서 ‘철학의 여백’에서 ‘존재가 놀고 있는 바닥 없는 장기판(bottomless chessboard)'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는 바닥 없는 장기판에 장깃말이 놓여질 수 없듯이 ’존재란 이런 것이다‘ 라고 존재를 확정 지을 안착지가 없음을 뜻함이다.
결국 존재는 어떤것으로도 그 의미를 결정 짓지 못하고 바닥 없는 장기판 위를 이리저리 떠돌 뿐이다. 그리하여 데리다에게 있어서 존재의 본질은 절대불변의 법칙이 아닌 ‘유희(놀이,play)’에 불과하다. 바로 이러한 존재론을 대변하는 용어가 바로 차연(差延)이다.
앞서 언급한 철학자들이 모두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이들이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바는 ‘불변’이 아닌 ‘변화’를 사유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서양 현대 철학의 흐름은 크게 볼 때, 공간 위주에서 시간 위주로, 정적인 것에서 동적인 것으로 그 사유 체계가 변모해 왔던 것이다.
오금희의 기본 정신을 존재론적으로 분석해 볼 때 역시 動의 철학이요, 시간의 철학이며 생성과 변화의 철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화타가 普에게 말하길 “인체는 움직여야하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안된다. 몸을 움직이면 피가 흐르게 되어 질병이 생기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흐르는 물이 썩지 않는 것과 같다.”’<화타오금지희도해 中>
이와같은 오금희의 원리는 이 시대를 지배하는 사유세계와 그 물줄기를 같이 함으로써 한층 리얼리티를 부여받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이천년전 화타 선생이 만들었다는 전설의 오금희가 비로소 아득한 시간의 장막을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생생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성과 변화의 속성은 다시 현대 물리학에서 찾아짐으로써 오늘날 그 존재의 위상은 한층 더 힘을 얻게 된다.

만물은 생성 변화한다.(2) : 현대 물리학 - 탄생과 소멸의 춤, 소립자의 세계.

상대성이론이 낳은 가장 획기적인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질량 에너지 등가의 법칙’은 ‘입자’에 대한 우리의 고전적 관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고전 물리학에서의 물체의 질량이란 물질적 실체와는 뗄 수 없는 관계로 인식되어져 왔다. 즉 물질의 입자란 항상 질량의 형태와 동일한 상태로 보존되며 정적이고 수동적인 속성을 지닌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상대성이론에 오면 질량은 물질적 실체와는 무관한 에너지의 한 형태임을 밝혀주고 있다. 이처럼 활동작용하는 에너지의 덩어리로서의 질량은 결국 소립자의 속성이 본래 견고하고 고정적인 실체가 아닌 가변적이고 역동적인 성질의 것임을 시사해주고 있다 하겠다. 따라서 소립자는 질량을 가진 물체로서의 ‘공간성’과 그에 등가하는 에너지 작용으로서의 ‘시간성’을 동시에 함유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입자에 관한 이와같은 새로운 견해는 입자에 대응하는 반입자(反粒子)의 존재를 밝혀낸 디랙(Dirac)에 의해 처음 알려지기 시작했다.
반입자(반물질)와 입자(물질) 사이에는 근본적인 대칭을 이루며 생성소멸의 상호작용을 해나간다는 그의 이론은 마침내 순수한 에너지에서 물질적 입자를 생성시키는 가장 극적인 결과를 얻어내기에 이른다.
한마디로 추상적인 형태의 에너지에서 구체적 물질 입자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자들의 속성을 연구하는데 이용되는 것은 높은 에너지로 입자들을 충돌시키는 실험방법이다. ‘고에너지 물리학’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충돌 실험은 양성자들이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가속된 다음 다른 양성자들이나 중성자들과 충돌하도록 하는 것인데, 이 때 소립자의 충돌은 에너지로 변형되며 그 운동 에너지는 다시 새로운 소립자의 질량을 형성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물질적 실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동적인 ‘에너지의 덩어리’들로서의 소립자들이 안정된 핵, 원자, 분자의 구조를 형성하며 거시적인 견고성을 부여받은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고정불변의 물질적 실체는 아원자의 세계로 들어갈수록 그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입자들의 상호작용은 물질계를 형성하는 안정된 구조를 낳지만 물질계는 결코 정적으로 머물러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고정된 입자적 요소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멸변화하는 ‘에너지의 율동’인 것이다.

만물은 생성 변화한다.(3) : 불교(佛敎) - 제행무상(諸行無常)

(이 글은 작년 여름 실상사에서 있었던 각묵스님과의 대담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각묵스님은 매우 진보적인 불교관을 지닌 소장 스님이시며, 인도에서 유학하시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한문이 아닌 인도어(산스크리트어와 빨리어)를 우리 말로 직역한 ‘금강경 역해’의 저자이십니다.)

<김숙경> 고전 물리학에서의 '물질 입자'란 항상 질량의 형태와 동일한 상태로 보존되며 정적이고 수동적인 속성을 지닌다고 여겨져 왔습니다만, 상대성이론에 오면 질량은 물질적 실체와는 무관한 에너지의 한 형태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활동작용하고 있는 '에너지의 덩어리'로서의 질량은 결국 입자의 성격이 본래 견고하고 고정적인 실체가 아닌 가변적이고 역동적인 성질의 것임을 시사해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철두철미하게 믿고 있는 '물질적 실체'라는 것은 미시의 소립자들의 세계로 들어갈수록 그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물질계의 내부는 결코 정적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생멸변화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대물리학에서의 물질관은 불교에서 말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과도 통하지 않나 생각 됩니다만, 스님께서는 이에 대해 어떠한 견해를 갖고 계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각묵스님> 그렇습니다. 제행무상은 바로 삼법인(三法印)의 하나로 제법의 존재가 영원불멸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찰나생 찰나멸 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입자의 최소 단위라 할 수 있는 '쿼크'도 따지고 보면 개념으로서의 존재이지 불변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지 않습니까?
1초에 10의 마이너스 23승으로 존재한다니 그야말로 '찰나생 찰나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다보니 서양의 과학자들도 불교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제법의 존재는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 현상까지 포함해서 일체가 찰나적 존재입니다. 보십시오, 생각(念)이란 '지금(今) 마음(心)'이란 뜻이 아닙니까? 지금이란 고정된 한 점의 시간이 아닌 흘러가는 찰나적 순간이므로 풀이하자면 지금 이순간에 찰나생 찰나멸하는 마음이라는 것이지요. 이와같이 제법의 존재는 물질은 물론 마음까지도 연기의 법칙에 의해 순간순간 찰나생멸 하는 것임을 깨닫고 그 실체의 무상함을 꿰뚫어 보는 것이야말로 곧 해탈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나'라는 존재도 철저하게 해체하여 보면 물질, 감각, 느낌, 지각, 심리현상, 대상을 인식하는 요소 등 5온(蘊)이라고 하는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현상일 뿐 '나'라는 본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또한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이라는 것도 별개의 고정된 존재가 아닌 나라는 주체의 인식 기관과 인식 대상과 그리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정신 현상으로 파악합니다.
이렇게 나라는 주체는 색 수 상 행 식의 5온으로 그리고 세상은 12처(處)의 대상과 나와의 관계로 해체하고 이를 다시 18가지로 분류하여 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함께 흘러가는 것이 '이 세상'이고 '나' 일 뿐 그 밖에 불변하는 고정적 실체가 따로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B.C 3세기경에는 정통 상좌부(Theravada)를 가리켜 '위밧자 와딘(Vibhajjavadin)' 즉 '분별(또는 해체)을 말하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불교 자체도 철저한 '해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구불멸의 실체를 해체한다는 것은 '열반' 또한 어딘가에 따로 존재하는 고정적 실체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열반이란 바로 탐, 진, 치가 소멸된 '지금 여기'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마주치는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매 순간마다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불교는 근본적으로 고정 불변의 법칙이 아닌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무한히 ‘역동적인 힘' 그 자체입니다.

만물은 생성 변화한다.(4) : 기학(氣學)과 도가(道家)

(이 글 중 도가를 언급함에 있어서는 생성과 변화를 강조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도가 사상에 드러나는 道와 氣의 관계를 ‘기학적 측면’에서 강조하였음을 밝혀둡니다.)

1. 氣는 변화하고 有形하며 생성이 끊이지 않는다.

전통 기학(氣學)의 역사를 살펴볼 때 태허(太虛)란 본래 우주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북송 시대의 장재는 '태허가 곧 기(太虛卽氣)'라 하여 우주 공간을 텅 빈 진공상태가 아닌 기로 꽉 들어찬 공간으로 보았으며, 후대의 왕부지 또한 태허의 본체는 기이고 기가 모이면 형체를 이루고 흩어지면 태허로 돌아간다 하여 장재에서 비롯된 '기본체론(氣本?論)'의 맥을 이어갔다.
최초로 서양 근대 과학을 전통 기론에 접목시킨 방이지 또한 허공은 무형(無形)의 기가 꽉 들어찬 것이고 무형의 기가 모이면 뭉쳐서 유형(有形)의 만물을 이룬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기가 뭉쳐서 천지를 이루고 천지의 빈 공간은 아직 뭉치지 않은 기의 상태인데 서로 갈마들며 변화하고, 나왔다 들어갔다하여 풀무와도 같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혜강 최한기 역시 공간 자체가 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특히 혜강은 '태허'라는 개념 대신 기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한다는 의미의 운화기(運化氣)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상 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이 기학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우주는 기로 꽉 들어차 있으며 만사물은 기로 구성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데 이러한 기는 끊임없이 운동 변화하며 기와 물질간에 상호작용하여 이합취산하는 성질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북송 시대의 ‘기일원론 철학’의 집대성자 장재는 변화와 생성이 멈추지 않는 기의 속성을 음양의 대립으로 보아 물질 세계는 음과 양 두기의 상호작용 하에 끊임없이 생성변화한다고 보았다.
장재의 사상을 이어받은 왕부지는 음양의 본체를 태극(太極)이라 하여 태극이 나뉘어진 것이 음양이요 음양이 합해진 것이 태극이라 하였다.
태극은 본래 <주역. 계사전>에서 역상(易象)을 해석하는 형식으로 제시된 우주 본원의 개념인데 송.명대 학자들은 대부분 태극을 리(理)로 보았으나 왕부지는 리는 기의 속성이므로 만물의 본원이 될 수 없고 본체로서의 태극은 기일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역시 만물의 속성을 고정불변의 무엇이 아닌 음, 양 두 기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에 의한 생성과 변화로 보았던 것이다.
이렇듯 변화 생성하는 음양의 기를 일찌기 노자(老子)는 충기(?氣)라 일컬었다.
충기의 ‘충’은 머물지 않고 운동하는 ‘음양의 기’라는 뜻이 된다.

2. 道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老子 42장)

노자는 그의 철학에서 道를 최고의 범주로 삼고 있다.
노자에게 있어서 무형의 도는 우주만물의 본체이며 만물이 운동하고 변화하는 총체적 법칙이다. 노자철학에 있어서 우주만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모름지기 도에서 비롯된다.
도가 변화하여 음양의 기가 나오고 음양의 기가 변화하여 천지만물이 나오고 나아가 만물이 생성변화 되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는 도로부터 나오고 도가 변화하여 만물을 생성해내는 중간 고리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겠다.
북송 시대의 왕안석은 고대 원기론(元氣論)을 바탕으로 노자의 도를 받아들여 원기는 도의 본체라는 독특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는 기를 원기와 충기로 나누고 원기는 움직이지 않지만 그의 작용으로 음양이 격렬하게 움직이는 충기를 낳고 충기는 운동변화 하는 가운데 오행과 만물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도본체론’적 견해는 청대의 대진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또한 만물의 생성과 존재를 도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독특한 점은 기를 도의 ‘물질 내용’으로 규정하여 기 자체는 형태가 없으나 내부의 모순과 대립의 성질을 가짐으로써 음양으로 나뉠 수 있고 음양자체도 마찬가지로 대립과 차이를 포함하고 있어 오행으로 구분되며 오행 또한 같은 이치로 온갖 사물로 분화된다는 것이다.
결국 만물의 속성은 정체된 고정불변의 것이 아닌 내부의 모순과 대립의 성질에 의해 끊임없이 생성 변화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만물은 생성 변화한다.(5) : 신화 - 창조와 파괴의 신, 시바와 함께 춤을.

‘오금희는 그 구성과 내용을 자연에서 취하여 왔다.
그 자세와 동작들은 자연과 잘 어울리는 것이므로 수련시에도 자연스러움에 기본을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른바 오금지공(五禽之功)이라 하지 않고 오금지희(五禽之戱)라 하는 것이다.‘ (화타오금지희도해 中)

앞의 각 장을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자연스럽다는 것은 고정불변함이 아닌 움직임이요 생성이요 변화이다.
‘멈추는 것은 가려는 뜻을 지니고 있고, 가는 것은 멈추려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서법과도 일맥상통하여 더욱 친밀감이 가고 서예에 빠지듯 운동에 심취가 될 때가 있다. 이것은 행동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 부드러움을 만들게 되고, 행동에 운율과 리듬을 싣고 있다. 그래야 글씨에 감정이 실려 예술의 경지에 이르는 이치와 같다. 선생님이 운동하실 때 보면 감정과 운동이 합쳐져 자연스러움과 부드러움이 중화의 경지를 느끼게 한다.’ (강명순님의 수련기 中)

‘매끄럽게 이어지는 동작들은 기상천외하다고 표현해야 할만큼 개성 있고 다양하다.
완만함과 부드러움이 주를 이루면서도 강하고 힘찬 동작이 포함되어 있는 점도 인상 깊다...... 일단 입구에 들어서면 그 자체의 관성에 따라 매듭에 이르게 되고 ... ’ (박세연님의 수련기 中)

우리는 이같은 오금희 동작에서 ‘창조와 파괴의 신’ 시바(Shiva)의 춤을 본다.
시바의 춤은 세계의 창조와 진화, 유지와 소멸의 에너지이다.
삼라만상의 존재는 그의 영원한 춤의 결과물이며 그것들의 소멸 또한 그러하다.
시바는 양쪽에 두 개씩 모두 네 개의 팔을 가지고 있다.
그의 오른팔의 윗 손에는 모래시계 모양의 소고를 들고 있는데 이는 진리를 전달하는 소리를 뜻하며 창조를 상징한다. 그 반대쪽인 왼 팔의 윗 손은 불꽃을 쥐고 있으며 불은 세상을 파괴하는 상징적 요소가 된다.
그리고 이 손들의 움직임에 따라 창조와 파괴의 끝없는 율동이 전개되는 것이다.
격렬하면서도 우아한 그의 몸놀림.
끝없이 선회하는 네 개의 손동작.
그것은 ‘생성과 소멸’
‘탄생에 꼭 맞는 죽음’
‘발아(發芽)인 동시에 멸진(滅盡)’
창조와 파괴의 춤은 그렇게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낳으면서 죽이면서 무시무종 이어진다.
그것은 나타남으로 사라지게 하고, 살아있으나 동시에 죽어있는 나타나기 위해 모든 모험을 감수하지만 끝내 사라짐 그 자체가 되고마는 ..... 바로 차연(差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