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男 2女, 우리 형제는 건강하신 부모님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건강한 편에 속했다.
그래서인지 초등?중학교 시절 학교운동회에서 우리 형제들은 거의 1등을 독차지 했다. 사실 지금처럼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는 밑천은 타고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없지는 않았다. 그것은 바로 무엇이든지 가족 전부가 해야 한다는 아버님의 철저한 원칙 때문이었다.
우리 가족은 일요일 오전이면 모두 대중목욕탕으로 향했다. 목욕이 끝난 후에는 아버지께서 손수 마련해 주신 영양식을 먹었다. 그것은 약간의 소금을 넣은 흰우유와 찹쌀떡 2개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두 태권도와 합기도를 했다. 형님은 초등학교 시절 태권도 선수로 활동하면서 학교축구팀 주장도 했다. 누님 2명은 모두 학창시절 육상대표였는데, 특히 큰 누님은 이후에 기계체조와 리듬체조를 전공하여 대학 때에는 전국체전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나와 내 동생 역시 학교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활발한 편이었다. 그 때문인지 나는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에게 육군사관학교에 응시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가까운 친척 중에 직업군인 생활하는 분을 알고 있던 나로서는 그리 마음이 끌리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이때가 아버지의 뜻에 반항했던 사춘기였던 것 같다.
그 후, 대학에 입학하고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박사과정 중 군입대를 하게 되었다. 이 때 아버지의 뜻을 따라 정훈장교로 입대한 나는 교육기간 중 1등을 하여 국방부장관상을 받게 되었다. 그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역시 머리로 하는 것보다는 몸으로 하는 것이 내 체질과 적성에 맞는 모양이다.
어쨌든 군생활은 내 체력의 황금기였다. 그 때문인지 힘든 야전부대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사단사령부 참모부 생활도 나에게는 그리 흥미롭지 않았다. 결국 나는 신병교육대 교관을 자원했다. 그 때 주위사람들이 내게 보냈던 그 안타까운 눈빛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나의 신병교육대 생활은 매일 매일이 운동의 연속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지 도 모르지만,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신났다. 한 달에 2회 40km행군, 매일 같이 이어지는 체력단련과 각종 훈련들도 내게는 그저 약간의 긴장감이 있는 진지한 스포츠로 느껴졌다.
그러나 문제는 제대 후에 생겼다. 제대 후 대학원에 복학한 후 나는 가능한 한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계획은 그저 계획일 뿐, 하루하루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또한 2002년 3월, 결혼 후에는 더욱 자주 핑계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자연히 운동과도 조금씩 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암으로 2년간 투병하는 기간 동안 5형제가 서로 순서를 정해 간병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완전히 생활리듬을 잃게 되었다. 그 결과는 정말로 가혹했다.
부모님께서 2005년 6월에 퇴원하신 후, 8월부터 오른쪽 어깨와 팔꿈치가 조금씩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느껴본 통증(!)이라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처음에는 오른쪽 어깨가 조금씩 무거워지더니, 오른쪽 팔꿈치와 손가락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조금씩 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피곤이 쌓여서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대처방안을 세우기도 했다. 특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을 줄이거나 학교에서 강의 중에 판서를 줄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깨와 팔, 손가락에 있는 이상한 느낌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침도 맞아 보았다. 2003년도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다가 허리가 삐끗해서 1개월 정도 한의원에서 침을 맞은 후 꼭 2년 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침을 맞아도 그 이상한 느낌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의 전기가 몸에 흘러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커져만 갔다.
2005년 11월, 어머니의 성화로 난생처음 한약도 지어 먹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누적된 피로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서 12월 초에는 거의 오른 팔이 마비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항상 건강을 자신하던 내게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어떤 날은 오른쪽 어깨 통증으로 눕지도 못하고 앉아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끔찍한 시간이었다.
2006년 1월, 한방 병원에서는 급성 목디스크라는 진단을 내렸다. 1개월 정도의 입원과 3-4개월의 요양이 필요하다고 했다. 의사는 조금 더 심해지면 수술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나는 어떻게든 입원하지 않고 자활능력을 키워보기 위해 노력했다. 나에게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내 아내는 그 해 2월부터 1년간 중국에서 연수를 해야만 했고, 우리부부도 이미 부모님과 합가하여 함께 생활한 지 1개월을 넘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입원을 하게 되면 아직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부모님께서 충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이 때 시작한 운동이 바로 국선도였다. 국선도를 배우게 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분이 국선도 도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분께서 몇몇 사람이 ??주역?? 공부도 하고 국선도 수련도 하고 싶다고 하는데 함께 참여해 줄 수 있느냐는 제안을 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국선도 수련은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4-5개월 수련기간 동안 어깨와 팔꿈치의 통증은 조금씩 완화되었다. 그러나 왠지 말끔하게 좋아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더구나 더위가 시작되면서 부터는 조금씩 무리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때 우연히 김성기 회장님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사실 5년 전부터 오금희와 예비공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막연하게 태극권 혹은 단학, 국선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국선도를 시작한 김에 오금희도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28기로 입학한 나는 ‘善한 표정과 마음을 소유한’ 서성호 선생님으로부터 화타 오금희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제 중급 심사가 다음 주로 다가왔다. 오금희에 입문한지 만 1년 2개월 만이다. 그 사이 내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먼저 국선도에 대해 말하자면, 작년 7월부터 수련을 중단했다. 사실 중단이라는 표현보다는 오금희로의 전환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덕분에 지금은 어깨와 목의 통증도 완전히 사라졌다. 물론 팔꿈치와 손가락의 이상한 느낌(!) 역시 없어진 지 오래이다.
2007년 2월, 1년 간의 중국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아내는 지금 초급반에서 오금희를 배우고 있다. 아내 말로는 처음 배울 때에 다리가 아파서 포기하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체질적으로 약한 아내인지라 사실 나도 얼마가지 않아 포기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이제는 허리도 부드러워지고 스스로 느끼기에 걸음걸이에도 힘이 생겼다고 말하는 아내를 볼 때면, 김성기 회장님과 박윤선 부회장님, 주영환 선생님께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다.
우리 부부는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집 앞에 공원에서 “부부 오금희”를 한다. 사실 공원에서 오금희를 혼자서 하는 것은 여간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아내가 중국에 있을 때에는 밤 늦게 공원에 나가서 오금희를 하기도 했다. 이제 오금희가 우리 부부의 즐거운 여가생활이 된 지 어언 6개월이 되어 간다. 그 동안 내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마도 그것을 여기에 모두 적는다면 한 권의 책이 될 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조만간 그 일에 대해 차근차근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에는 분명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왕이면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생활하는 편이 우리의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일찍이 孔子께서도 ??논어??에서 ‘지혜있는 사람은 어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산다’고 했던 모양이다. 이것이 바로 성현들이 강조하는 “거필택린(居必擇隣)”의 가르침일 것이다.
오금희는 좋다. 적어도 나에게 좋았고, 우리 부부에게도 좋았다. 더구나 나와 같은 이러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곳은 그래서인지 더욱 겸손하고 善한 사람들이 유독 많다. 좋은 이웃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라면 어서 빨리 화타오금희를 시작해보세요. 분명 당신은 그 곳에서 좋은 이웃을 만나게 될 것이며, 또한 건강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명심하세요!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흐르고, 우리의 몸은 늙어간다는 것을.....”
그래서인지 초등?중학교 시절 학교운동회에서 우리 형제들은 거의 1등을 독차지 했다. 사실 지금처럼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는 밑천은 타고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없지는 않았다. 그것은 바로 무엇이든지 가족 전부가 해야 한다는 아버님의 철저한 원칙 때문이었다.
우리 가족은 일요일 오전이면 모두 대중목욕탕으로 향했다. 목욕이 끝난 후에는 아버지께서 손수 마련해 주신 영양식을 먹었다. 그것은 약간의 소금을 넣은 흰우유와 찹쌀떡 2개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두 태권도와 합기도를 했다. 형님은 초등학교 시절 태권도 선수로 활동하면서 학교축구팀 주장도 했다. 누님 2명은 모두 학창시절 육상대표였는데, 특히 큰 누님은 이후에 기계체조와 리듬체조를 전공하여 대학 때에는 전국체전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나와 내 동생 역시 학교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활발한 편이었다. 그 때문인지 나는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에게 육군사관학교에 응시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가까운 친척 중에 직업군인 생활하는 분을 알고 있던 나로서는 그리 마음이 끌리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이때가 아버지의 뜻에 반항했던 사춘기였던 것 같다.
그 후, 대학에 입학하고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박사과정 중 군입대를 하게 되었다. 이 때 아버지의 뜻을 따라 정훈장교로 입대한 나는 교육기간 중 1등을 하여 국방부장관상을 받게 되었다. 그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역시 머리로 하는 것보다는 몸으로 하는 것이 내 체질과 적성에 맞는 모양이다.
어쨌든 군생활은 내 체력의 황금기였다. 그 때문인지 힘든 야전부대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사단사령부 참모부 생활도 나에게는 그리 흥미롭지 않았다. 결국 나는 신병교육대 교관을 자원했다. 그 때 주위사람들이 내게 보냈던 그 안타까운 눈빛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나의 신병교육대 생활은 매일 매일이 운동의 연속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지 도 모르지만,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신났다. 한 달에 2회 40km행군, 매일 같이 이어지는 체력단련과 각종 훈련들도 내게는 그저 약간의 긴장감이 있는 진지한 스포츠로 느껴졌다.
그러나 문제는 제대 후에 생겼다. 제대 후 대학원에 복학한 후 나는 가능한 한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계획은 그저 계획일 뿐, 하루하루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또한 2002년 3월, 결혼 후에는 더욱 자주 핑계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자연히 운동과도 조금씩 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암으로 2년간 투병하는 기간 동안 5형제가 서로 순서를 정해 간병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완전히 생활리듬을 잃게 되었다. 그 결과는 정말로 가혹했다.
부모님께서 2005년 6월에 퇴원하신 후, 8월부터 오른쪽 어깨와 팔꿈치가 조금씩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느껴본 통증(!)이라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처음에는 오른쪽 어깨가 조금씩 무거워지더니, 오른쪽 팔꿈치와 손가락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조금씩 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피곤이 쌓여서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대처방안을 세우기도 했다. 특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을 줄이거나 학교에서 강의 중에 판서를 줄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깨와 팔, 손가락에 있는 이상한 느낌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침도 맞아 보았다. 2003년도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다가 허리가 삐끗해서 1개월 정도 한의원에서 침을 맞은 후 꼭 2년 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침을 맞아도 그 이상한 느낌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의 전기가 몸에 흘러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커져만 갔다.
2005년 11월, 어머니의 성화로 난생처음 한약도 지어 먹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누적된 피로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서 12월 초에는 거의 오른 팔이 마비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항상 건강을 자신하던 내게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어떤 날은 오른쪽 어깨 통증으로 눕지도 못하고 앉아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끔찍한 시간이었다.
2006년 1월, 한방 병원에서는 급성 목디스크라는 진단을 내렸다. 1개월 정도의 입원과 3-4개월의 요양이 필요하다고 했다. 의사는 조금 더 심해지면 수술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나는 어떻게든 입원하지 않고 자활능력을 키워보기 위해 노력했다. 나에게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내 아내는 그 해 2월부터 1년간 중국에서 연수를 해야만 했고, 우리부부도 이미 부모님과 합가하여 함께 생활한 지 1개월을 넘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입원을 하게 되면 아직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부모님께서 충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이 때 시작한 운동이 바로 국선도였다. 국선도를 배우게 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분이 국선도 도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분께서 몇몇 사람이 ??주역?? 공부도 하고 국선도 수련도 하고 싶다고 하는데 함께 참여해 줄 수 있느냐는 제안을 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국선도 수련은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4-5개월 수련기간 동안 어깨와 팔꿈치의 통증은 조금씩 완화되었다. 그러나 왠지 말끔하게 좋아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더구나 더위가 시작되면서 부터는 조금씩 무리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때 우연히 김성기 회장님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사실 5년 전부터 오금희와 예비공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막연하게 태극권 혹은 단학, 국선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국선도를 시작한 김에 오금희도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28기로 입학한 나는 ‘善한 표정과 마음을 소유한’ 서성호 선생님으로부터 화타 오금희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제 중급 심사가 다음 주로 다가왔다. 오금희에 입문한지 만 1년 2개월 만이다. 그 사이 내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먼저 국선도에 대해 말하자면, 작년 7월부터 수련을 중단했다. 사실 중단이라는 표현보다는 오금희로의 전환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덕분에 지금은 어깨와 목의 통증도 완전히 사라졌다. 물론 팔꿈치와 손가락의 이상한 느낌(!) 역시 없어진 지 오래이다.
2007년 2월, 1년 간의 중국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아내는 지금 초급반에서 오금희를 배우고 있다. 아내 말로는 처음 배울 때에 다리가 아파서 포기하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체질적으로 약한 아내인지라 사실 나도 얼마가지 않아 포기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이제는 허리도 부드러워지고 스스로 느끼기에 걸음걸이에도 힘이 생겼다고 말하는 아내를 볼 때면, 김성기 회장님과 박윤선 부회장님, 주영환 선생님께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다.
우리 부부는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집 앞에 공원에서 “부부 오금희”를 한다. 사실 공원에서 오금희를 혼자서 하는 것은 여간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아내가 중국에 있을 때에는 밤 늦게 공원에 나가서 오금희를 하기도 했다. 이제 오금희가 우리 부부의 즐거운 여가생활이 된 지 어언 6개월이 되어 간다. 그 동안 내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마도 그것을 여기에 모두 적는다면 한 권의 책이 될 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조만간 그 일에 대해 차근차근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에는 분명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왕이면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생활하는 편이 우리의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일찍이 孔子께서도 ??논어??에서 ‘지혜있는 사람은 어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산다’고 했던 모양이다. 이것이 바로 성현들이 강조하는 “거필택린(居必擇隣)”의 가르침일 것이다.
오금희는 좋다. 적어도 나에게 좋았고, 우리 부부에게도 좋았다. 더구나 나와 같은 이러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곳은 그래서인지 더욱 겸손하고 善한 사람들이 유독 많다. 좋은 이웃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라면 어서 빨리 화타오금희를 시작해보세요. 분명 당신은 그 곳에서 좋은 이웃을 만나게 될 것이며, 또한 건강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명심하세요!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흐르고, 우리의 몸은 늙어간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