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영선사사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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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타오금희

장경영선사사략

장경영(張鏡影) 선생 사략(事略)

경영 선생의 이름은 번창(繁昌)이고 호는 준영(俊穎)이며 귀주성(貴州省) 흥인현(興仁縣) 사람이다. 민국전(民國前) 12년(庚子, 서기1900년)에 태어났다. 선조들은 명(明)나라 이래 산서(山西) 심수(沁水)에 대대로 거주해 왔다.

청(淸) 가경(嘉慶) 연간 증조부 조훈공관(朝勳公官) 병부시랑(兵部侍郞)은 병사를 이끌고 귀주성(貴州省)에 진입하여 반강(盤江) 묘족(苗族) 용마의 난을 평정하였는데, 정풍(貞豊) 격전에서 불행히도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조부 경조공관(經祚公官)은 귀서병비도를 맡았고, 부친 유경공(維鏡公)은 귀주 대정 지부와 환남도의 요직을 지냈다.

신해혁명 연간 형 장백린은 동맹회 귀주지부를 조직하여 무한 봉기군에 맞서 싸웠고, 귀주 광복 후 추밀원 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장씨 가문은 이처럼 대대로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다.

선생은 광서 31년(1906년) 6세의 나이에 안남현립소학교에 입학하였고, 이후 귀주성립모범중학교를 거쳐, 민국 7년(1918년) 국립북경대학 법정예과에 입학하였다.

민국 8년 북경정부 현지사 시험에 합격하여 호북 대야현 지사로 발령받았으며, 민국 9년 형 장백린이 상해에서 별세하자 상해로 향해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였다.

이후 광동대학에서 수학하고, 손중산 대통령의 특파원 임무를 수행하며 계림으로 파견되었고, 광주 수복 후 대본영 보좌관에 임명되었다.

민국 14년에는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 기록을 담당하였으며, 귀주성 정부 비서장 대행으로도 활동하였다.

당시 낡은 관료 풍습과 아편 문화를 철폐하기 위해 업무시간을 엄격히 시행하고 관료 조직을 개혁하였으며, 위녕현 현장으로 부임한 뒤에는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을 중시하여 지역 사회를 안정시켰다.

민국 18년 전군이 귀주성으로 침입했을 때, 선생은 국고를 풀어 병사를 모집하고 군량미를 제공하여 위기를 극복하였다. 이후 금연총국 국장으로 선임되어 아편 밀수를 엄단하였다.

이후 중산대학, 금릉대학 등에서 법학과 문학을 강의하였고, 항일전쟁 시기에는 군법감과 헌병학교 교수로 활동하였다.

민국 31년에는 중국 국민당 당사회 편집처장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사법원 법규연구위원, 공무원징계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선생은 지방 행정, 학문, 중앙정부 활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큰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법학 연구와 교육 분야에서 탁월한 명성을 얻었다.

대만으로 건너간 이후에는 국립대만대학, 정치대학, 보인대학 등 여러 대학에서 교수 및 연구지도를 맡았고, 대학입시위원 및 박사학위 시험관으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공문학』, 『민법전의』, 『행정법론』, 『상사법전의』, 『비교헌법』 등 수많은 저서를 집필하였다.

선생은 화타오금지희에도 정통하여, 노년에도 매우 건강하였고 걸음걸이가 젊은이처럼 힘찼다고 전해진다.

화타오금지희는 항일전쟁 시기 사천성 청성산에서 한 도사를 만나 전수받은 것으로, 이후 대만으로 옮겨간 뒤에도 스승의 명에 따라 오랫동안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화타오금지희의 맥이 끊어질 것을 우려하여, 여종기·호국번·왕화중·등복보·곽정헌 등에게 이를 전수하였다.

그 중 곽정헌 공이 가장 열정적으로 수련하였고, 이후 화타문 단체를 설립하여 화타오금지희가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장경영 선생은 학문과 수련, 교육과 행정에 평생을 바쳤으며, 후대에 깊은 영향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